전세사기 구제를 둘러싼 여러 의견들. 이번 포스팅에서는 그 시작으로 우리가 지금 전세사기라고 부르는 것과, 가장 최근에 이 전세사기 때문에 희생된 분의 상황을 돌아보며 국가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대한민국에서 2009년에 발간되어 이듬해에 사회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킨 책 "정의란 무엇인가 (Justice)".
이 책은 저자인 마이클 샌델이 1980년부터 같은 이름으로 진행한 수업의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당 강의는 EBS에서 방영된 바 있으며, 유튜브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총 12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 강의 영상 중 에피소드 3에서 마이클 샌델은 엄청난 부를 이룬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의 경우를 이용해 "세금에 의한 재분배를 재산을 가진 사람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불공정한 행위"로 보는 자유주의적 관점에 대한 학생들의 의견을 묻는데, 한 학생이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릴 때부터 열심히 스케이트보드를 모아서 100개가 되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동네의 다른 사람들도 스케이트보드를 원하게 되었다는 이유로 내 스케이트보드 99개를 강제로 빼앗긴다면 이는 매우 부당한 일이다"
마이클 샌델은 이 학생에게 묻는다.
"좋은 곳에 쓰기 위한 세금 징수가 도둑질(theft)이라는 건가요?"
학생은 머뭇거리다 긍정한다.
"I think it's unjust... Yes, I do believe it's theft" (불공정한 것 같아서요... 네. 도둑질이라고 봅니다)
학생은 뒤이어 "그래도 그 도둑질을 묵과할 필요는 있나보죠 (but perhaps it is necessary to condone that theft)"라고 단서를 달기는 했지만, (강의가 진행되었던 시기에 그가 가졌던) 그의 시각은 비교적 분명해보인다.
다만 그가 간과한 사실이 있는데, 바로 마이클 조던이든, 스케이트보드를 모아둔 학생 본인이든, 자유주의자들의 주장대로 세금 징수를 최소화하거나 아예 그만두고 사실상 정부 기능을 올스톱시킨다면, 그들이 지금 가진 능력이나 스케이트보드를 가질 수 있게 되는 동안 자신들도 모르게 받았던 위험들로부터의 보호도, 성공에 필요한 최소한의 교육을 받을 기회나, 건강이 안 좋을 때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깨끗이 나을 기회도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미드 [워킹데드]를 생각해보라.
약간의 과장이 있겠지만 정부가 없다는 것, 국가가 아무 것도 안 한다는 것이 그런 것이다. 지금까지 본인을 포함해 대부분의 국민들이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영양실조나 범죄, 질병에 당하지 않고 생존해 있다면 이미 지금 이 순간까지 국가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납세자가 되기도 전인 어린 시절부터 받아온 그 도움은 당연히 기존의 다른 납세자들 덕분에 받을 수 있었던 것이며, 수십 수백년을 거슬러올라가 현재까지 대대로 당신의 집안에 돈이 넘쳐나고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의료, 교육, 치안 등 모든 걸 당신들 집안의 돈만으로 자급자족하며 해결해온 게 아닌 이상 당신은 이미 다른 납세자들의 세금으로부터, 그리고 그 세금을 잘 사용해준 국가로부터 신세를 진 것이다.
만약 그런 도움이 없었다면, 마이클 조던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정글같은 세상에 던져졌을 것이며, 그가 던져진 세상은 길에서 사람들을 아무렇지 않게 쏴죽이고, 힘의 논리에 따라 먹을 것을 약탈하는 [워킹데드] 같은 무정부상태로, 애초에 기본적인 보호를 기대할 정부 같은 존재 따위는 없기에 농구선수고 나발이고 성인이 되기 전에 조기사망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부 자유주의적 관점을 가진 순진한 분들은 간과하고 있는 셈이다.
(아니, 어쩌면 [퍼지]라는 영화가 더 와닿을 수도 있겠다)
물론 애초에 세금징수와 99%의 사유재산을 강탈하는 것을 동일시하는 것부터가 잘못이고 말이다.
즉, 우리들이 지금 누리는 모든 것들은 절대 우리 개인의 잘남으로만 얻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싫으나 좋으나 태어나서 지금 이 순간까지 국가의 보호를 받고 있고, 이 보호가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하는 데에 정부의 엄청난 노력과, 당연히도 엄청난 재원이 필요했다. 미리 세금을 내고 있던 이들과, 이 세금을 제대로 써준 정부 덕분에 이들은 안전하게 자라서 농구스타 또는 스케이트보드 부자가 될 수 있었고, 갑자기 이제 와서 "우리는 도움 받은 것 1도 없고 온전히 우리 스스로의 능력만으로 지금까지 태어나고 살아남아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이다"라고 주장한다면, 이는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얕은 사고의 결과인 셈이다.
위 학생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절대 없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생각을 가질 권리가 있고, 그 중 누구의 생각이 다른 누구의 생각보다 절대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만의 하나 그가 정말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는 그가 지금 가진 모든 것이 온전히 그만의 공이 아니듯, 그만의 잘못이 아닌, 그가 정부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못한 사회의 책임, 우리의 책임인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특히 한국 사회처럼 집요하게 기본적인 국민 보호에 드는 노력을 폄훼하고 세금 징수와 국민 보호 장치들을 "좌파짓"으로 선동하는 사회에 사는 우리들은 이 사실을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다가, 알고보면 재정적이든, 건강이든, 그 어떤 작은 충격에도 쉽게 무너질 수 있는 우리가 비로소 그런 충격에 노출되면 그제서야 국가라는 존재의 의무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작은' 충격들에 노출되어 위험해 처하는 이들은 특히 정부가 국가의 의무를 우습게 알 때에 급증한다. 그리고 위험에 처한 이들은 희망이 없다고 믿기 시작하면 단 몇 달도 견디기 어렵다.
그렇게 지난 1일에도 위험에 노출되어 희망을 찾지 못했던 또 한 명의 국민이 안타까운 선택을 했다.
본 포스팅의 내용은 지난 5월 1일에 전세사기로 인한 8번째 희생자가 발생한 대구의 [전세사기 깡통전세 피해 대책위원회]에서 활동 중인 정의당 대구시당 한민정 위원장님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2부에서 계속
전세사기 구제 2부 - 8번째 희생자
1부에서 이어서 전세사기 구제 1부 - (쓰다보니 삼천포) 국가의 의미란?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calmcast.tistory.com 본 포스팅의 내용은 지난 5월 1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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